사전을 찾지 말고 책을 읽으라는 말에 대해
반발 하시는 분이 꽤 많아서 나름의 생각을 한 번 적어봅니다.
많은 분들이 사전을 찾아보면 뜻이 이해가 된다고 생각하시는데...
과연 그런지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예를 들면 economy란 단어....
경제라고 번역이 되는데...
"경제"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거나
아니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분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요?
대부분 그냥... 돈과 관련된 내용...
정도로 막연히 이해하거나
혹은 경제학 또는 신문의 경제면에서 다루는 내용 등으로
순환적 정의로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좀 더 추상적인 것으로 가서
metaphysics 라든가 philosophy 정도만
되어도 번역을 해 봤자
그게 뭔지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영어단어가 그런 어려운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단어가 사전을 찾아도 어떤 정보도 주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사전을 찾아서 바로 이해가 될 정도의 단어들은
대개 지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 수준으로도
충분히 만족을 줄 수 있는 단어들이 대부분이란 겁니다.
그런데 이런 수준의 단어들은 사전을 보기 보다는
오히려 그림이나 사진을 보는 쪽이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예를 들면,
antler 같은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가지진 뿔"이라고 나오지만
이렇게 이해하고 외우기 보다는
차라리 사슴 사진을 보고 저 뿔을 antler라고 부른다
라고 이해하는 쪽이 기억에도 훨씬 오래남고 알기도 쉽다는 거죠.
또 한가지 예를 들자면
crocodile과 alligator은 사전에서는 둘 다 악어로 나와 있죠.
하지만, 영어에서는 분명히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진을 잘 관찰해 보면 모양이 다릅니다.
결국 이런 단어들을 사전에 의존하게 되면
나중에는 백과사전 뒤져야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생물도감까지 찾아봐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물론 번역가들에게는 이러한 작업도 필요합니다.)
뭐... 사람들마다 처해진 상황이 다르고
공부하는 스타일이 다르니
그런 식으로 공부하겠다는 분들을 말릴 이유도 없지만
문제는 그런 식의 독서는
재미를 떨어뜨리고 부담을 가중시켜서
결국에는 오랜 독서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독서를 하시는 분들은
끝까지 거꾸로 번역해서 이해를 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얼마전 잉하님이 올려주신 글에서 보니
한국 고교생들의 영어 독해 속도가 50~80WPM이라고 하더군요.
미국의 초딩 저학년 보다도 느린 셈인데....
왜 그럴까요? 단어를 몰라서?
단어는 한국 고교생들이 훨씬 많이 알고 있을 겁니다.
원인은 결국 역순 번역한 후 이해하는 독해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말이 너무 길어져서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전을 계속 찾고 한국어로 단어의 뜻을 외우고 확인한다는 것은
문장을 번역을 해 보지 않고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구요.
그런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영어를 빨리 읽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역순 번역 방식을 고집하면서도 150wpm 이상의 속도로 책을 읽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습관을 버리지 않고도 미드나 미국영화 자막 없이 보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집중력을 소모하게 되지요.
예전에 영어를 꽤 잘하는 친구(토익은 거의 만점, 토플은 종이시험 600점 정도)와 같이 비행기를 타고 간 적이 있는데
비행기 안에서 할 일이 없으니까 그냥 영화를 계속 봤습니다.
일본 국적기여서 미국 영화에 일본어 자막이 나왔는데....
영화를 두 편 정도(약 4시간 소요) 보고 나니까
그 친구의 얼굴이 노랗게 뜨더군요.
멀미하냐고 물어 보니까 ... 영화 보느라고 머리 너무 많이 써서 그렇다는 겁니다.
"나는 괜찮은데?" 하고 다시 물으니...
"형님은 일본어로 읽었으니까 훨씬 편하시겠지요..."라더군요.
이 친구 4시간 동안 번역하고 있었던 겁니다. 당연히 머리에 스팀 좀 받겠지요.
역순 번역 습관을 가진 분들은 대개가 이렇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책읽기나 드라마 보기가 힘겨운 노동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다독을 권장하시는 분들은 사전을 찾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사전을 절대 보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책을 읽는 동안은 사전을 안 보고 이해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이죠.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뭔가 계속 머리 속에 맴도는 단어들이 있다면
그런 건 사전을 찾아봐도 됩니다. 찾아보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영영사전으로....
그런데, 아는 단어가 너무 적어서 사전 없이는 읽을 수 있는 책이 없는 분들은?
어린이용 그림책부터 읽어야겠죠.
그리고 그림 사전 같은 것들도....
이런 책들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 습관을 붙이는 데는 더 없이 좋은 교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밖에...
English through Pictures 나
펭귄에서 나온 Test your vocabulary 같은 책들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쓰다 보니 말이 두서 없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내용들은 순전히(!)
시간을 들여서라도 제대로 된 영어실력을 붙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당장의 시험점수가 필요한 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덧붙여 둡니다.